붉은 감자
더위가 한창 무르익는 필월 휴가에 승주군 선암사 입구에 막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밖의 더위는 잠시 잊고 있었던가. 승용차에서 내리니 더위가 한 달음에 안겨든다. 온 몸을 감싸안으며 아스팔트 땅위로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니 그야말로 푹푹 찌는 무더위라는 게 실감이 난다. 몇걸음 앞에 나뭇그늘 곱게 드리운 정자가 있어 사람들이 헉헉거리면서도 앉아있는 폼이 꽤시원해 보인다. 약수터의 물을 받아 마시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더위엔 역시나 시원한 물. 그이상 뭐가 있겠나 싶다.
'여름산사체험'이라고 쓰여있는 프랑카드가 길을 가로지러 걸려있다. 굵직한 나무들이 무성한 잎사귀들을 반짝반짝 저마다 속삭이듯 드리우고 그 거대한 나무만큼이나 그늘이 짙게 어린다. 일행들은 어느새 선암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난 어린 아이들과 다리도 쉴겸 이 산사입구 정자 아래서 약숫물이나 마시며 그들이 내려올때까지 기다리마고 미리 선암사 오름을 포기한다. 아니, 포기라기보단 일전에 한번 갔었던 기억을 더듬고 있겠다는 편이 좀더 낭만적이리라. 언젠가 남편과 아이들을 앞세우고 찾아가본 선암사. 순천가는 길에 잠시들렀던 적이 있다.
매표소 입구까지 수령이 상당한 나무들이 길 양옆에 우뚝우뚝 서 있었다. 갖은 풍진에 깎이고 깎였을 세월의 흔적들이 나무의 굵기는 물론 그 휘어진 형태까지 역사의 한 장면처럼 고스란히 느껴지는 고목.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무릎꿇지않는 이 그 누가 있으랴.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딸아이가 보채는 대로 발길을 옮겨본다. 약수터 옆 선암사 입구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할머니들께로 내 손을 잡아끈다. 삶은 계란부터 말린 고사리, 참기름, 물외,호박,옥수수, 콩, 쪽파, 무화과, 감자.......저것들을 다 사가지고 집에 가서 전부 밥상에 올리면 그야말로 푸짐한 웰빙밥상이 될터. 경치만큼이나 거짓없고 소박하고 귀한 것들 아닌가. 무화과를 맛보니 그건 바로 어릴적 먹었던 바로 그 맛 그대로 인걸. 이 얼마나 반가운 것들인가.
아파트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집집마다의 화단은 꿈도 못 꿀 처지 아닌가. 어릴적 친정집엔 한 그루 무화과 나무가 있었다. 해마다 이 맘때면 배꼽사이로 붉은 기운이 아롱져 있고 살짝 손끝으로 눌러보면 물컹물컹한 무화과는 이미 익을대로 익은 거다. 그걸 가만히 따서 한 입 베어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똑'하고 가지에서 딸때 흰진액이 둥글게 올라온다. 상처가 났을땐 그 무화과 진액을 환부에 바르기도 했다. 그 무화과에 대한 기억은 고향떠난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무화과만 보면 새록새록 살아난다.
아이는 이어 옥수수를 가리킨다. 그래 오늘 하루 너의 주전부리는 이것들 이상 더 좋을 것이 어디 있으랴. 알알이 박힌 옥수수는 하모니카에 비유되기도 한다. 하모니카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옥수수를 불면 금새 아름다운 선율이 느껴질 것도 같다.

아이는 이번엔 감자를 사달라고 보챈다. 붉은 감자가 그릇 한가득 소담히 놓여있다. 어? 내가 아는 감자는 엹은 흰빛 또는 노르스름한 빛의 감자인데....... 가만가만 들여다보니 언젠가 오일장에서 간간이 붉은 감자를 본듯도 하다. 그때는 깊이 생각지 못했는데 이곳 선암사에선 그 붉은 감자가 괜시리 설레게 한다. 고구마빛이 나는 덩그런 감자. 고구마는 감자처럼 뭉툭하면서도 길쭉한 편이다. 그리고 그 길쭉한 끝부분은 줄기에서 떼어낸 자국이 선명하다. 고구마는 줄기가 길게 땅바닥을 따라 뻗으면서 잎자루 부분에서 뿌리가 나와 땅속으로 들어가 덩이뿌리(괴근.塊根)가 된것이고, 감자는 땅속에 묻혀 있는 줄기마디로부터 가는 줄기가 생겨나와 그 끝이 비대해져 덩이줄기(괴경.塊莖)를 형성한다. 고구마는 뿌리채소이고, 감자는 줄기에 녹말 등을 저장해서 부푼 줄기채소가 아닌가. 물론 둘다 흙 속에서 살이 찐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고구마와 감자. 색깔로선 고구마이며 형태로선 감자인게다.

찐붉은 감자는 약간 노르스름한 치자빛도 띤다. 아이가 한 입 가득 물고 감자를 먹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감자는 본래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에서 살던 잉카족이 재배했는데, 유럽으로 건너 간 것은 16세기 스페인의 탐험가 피사로가 항해 중 식량으로 먹으면서 유럽에 전파되었다. 훨씬 뒤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생김새가 말방울 같다고 해서 마령서(馬鈴薯)라고 했고, 북에서 들어왔다해서 북감자, 또는 하지감자로도 불린다.
감자는 맛도 담백하고 조리법도 다채로와 계속 먹어도 좀체 싫증이 나지 않는다. 프랑스 사람은 튀긴 감자를, 영국 사람은 삶아 먹기를 좋아한다. 미국 사람은 다양한 요리법으로 변화하는 맛과 모양으로 감자를 즐긴다. 독일에선 감자를 채소의 왕으로 불린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감자를 적극적으로 권장했기 때문이라 한다. 어려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육식을 많이 하는 나라에서는 끼니마다 식탁에 없어서는 안되는 식품이다.
농사짓는 마을에 태어난 나는 씨감자를 구하고 쪼개서 땅에 묻고 싹이 나오는 과정을 직접체험하면서 자랐다. 그만큼 감자는 나의 정겨운 동무나 다름없다. 제삿집에 가서 늦은 밤 아이들은 따분한 시간을 때우던 소재중 하나가 바로 "감자에 싹이나서 이파리에 감자 감자감자가위바위보"로 시작되는 놀이도 생생히 기억난다. 또 감자는 '지실', 고구마는'감제'로 통하던 우리 고장말(제주). 지금도 감자라는 표현보다는 지실이라고 하면 그 정감이 더욱 짙어진다.
붉은 빛깔의 감자를 보는 순간 "그래 저걸 가져가서 한번 쪄봐야지....."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사라고 보채는 아주머니의 권유에 흔쾌히 동의한다. 가방 속에 2000원어치의 붉은 날감자를 담고 오는 내내 꼭 소꿉장난같은 생각이 들어 한편 쑥스럽기까지하다.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동시 <감자꽃> 전문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여자, 내 길고 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이재무 시 <감자 꽃>
그날이 오면 스스로 싹틔우면서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봄을 맞겠네
에헤라 탐스러운 감자꽃도 피워 올리고
........
아아 그 5월이 다시 오면
한라에서 백두까지 마구 지천으로 피어나는 감자꽃이겠네
민주의 넋이겠네
-김용락 시 <그날이 오면>
자주 보라 자주 보라
자주 감자꽃 피어 있다
일 갈 적에도
마을회관 놀러 갈 적에도
문 안 잠그고 다니는 니 어미
누가, 자식 놈 흉이라도 볼까봐
끼니 때 돌아오면
대문 꼭꼭 걸어 잠그고
찬밥에 물 말아 훌훌 넘기는
칠순에 닿은 니 홀어미나
자주 보라 자주 보라.
자주 감자꽃 피어 있다
어머니가 챙겨 싸준 감자
쩌글쪼글 썩혀서 버린 화단에
자주 감자꽃은 피어,
꽃핀 나 볼라 말고
쪼글쪼글 오그라드는
니 홀어미나
자주 보라 자주보라
-박성우 시<보라 감자꽃> 전문
감자를 노래한 시인들이 참 많다. 물론 김동인 선생의 소설<감자>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역시 우리나라 서민들의 삶의 중심에 감자가 놓여있다. 아무리 먹을게 귀하던 보릿고개를 겪으면서도 감자 몇개로 끼니를 해결해야했던 우리 민중들의 삶이 있다.
북한에선 '감자혁명'이라 하여 식량난을 해결하기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난 조인스닷컴(8월7일)의 보도에 의하면 백두산 부근 백무고원에 월드비전과 북한 민족경제협력연합회가 연합해서 생산한 씨감자가 한창 자라고 있다고 한다. 북한의 식량 부족량이 연 150만t 쯤 되는 점을 감안하면 무 바이러스 씨감자는 식량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다. 북한은 남한의 농업진흥청 감자연구소에서 개발한 수경재배 방식의 무 바이러스 씨감자에 관심을 보였고 대흥단군이 7년여만에 씨감자 생산 공장이 준공되는 단계까지 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 소식통은 고구마처럼 생으로 먹는 고구마 밸리는 국내 최초로 붉은 색 표피의 감자 심품종으로 단백질 함량은 기존 종자보다 높으면서도 열량은 적다고 한다. 강원대학교 임학태박사가 컬러감자를 개발연구했다는 보도가 몇해전에 있었다. 보라색 빨간색 노란색 등 다양한 컬러의 기능성 감자 품종들은 감자선진국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외국에서도 시험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붉은 감자를 깨끗이 씻고 찜통에 놓고 찐다. 강한 불로 40분 정도 가열하면 구수한 찐감자가 완성된다. 아이들 간식거리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찐감자. 껍질 벗끼기가 무섭게 접시가 비워진다. 찐감자를 너무도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감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친다.